바이러스기초연구소를 생명공학연구원이 아니라 기초과학연구원(IBS) 부설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는 모양이다. 아예 보건복지부와 과기부가 구상하는 두 연구소를 합쳐서 하나의 독립된 출연연을 만들자는 법안도 발의됐다고 한다. 그런데 연구소의 성패는 ‘지배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연구소의 당위성‧역할‧과제, 인력‧예산의 규모와 확보 방안에 대한 훨씬 더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더욱이 바이러스기초연구소 설립이 포함된 질병관리본부 개편안은 대통령의 전면 재검토 지시로 폐기된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K방역의 주역은 생명공학 벤처들
모든 일을 정부가 앞장서야 했던 때가 있었다. 중화학·반도체·자동차 산업도 정부가 육성했고, 고속도로도 정부가 건설했다.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폐기해버리겠다는 원전 산업도 사실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키운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생명공학 선진국인 미국·유럽·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초의 ‘RT-PCR 진단키트’를 개발한 것은 정부가 아니었다. 대덕에 뿌리를 둔 바이오 벤처들이 그 주역이었다. 대통령도 몰라주고, 과기부·복지부·질병관리본부도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팩트다.
바이오 벤처들의 활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양한 항체 진단키트도 개발했고, 치료제‧백신의 개발도 빠르게 진행 중이다. 중증 환자의 치료 기간을 줄여주는 것으로 알려진 렘데시비르보다 항바이러스 효능이 600배나 강한 후보물질도 찾아냈다. 현재 13종의 치료제에 대한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3종의 백신 후보 물질에 대한 임상시험도 연내에 시작될 전망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기초·원천 연구도 출연연·대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스-코로나바이러스-2의 고해상도 유전자 지도를 가장 먼저 완성한 것도 우리 과학자들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과기부‧복지부의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 억지다. 오히려 바이러스에 대한 응용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바이오 벤처와 대학·출연연에서 기초·원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바이러스 연구자들에게 모욕적인 주장이다. 바이러스기초연구소 설립이 자칫 바이오 벤처와 바이러스 연구자들의 기를 꺾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자신들의 몫만 챙기려는 이기적 관료주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세계 최악의 ‘감염 대국’이었던 우리를 한순간에 ‘방역 선진국’으로 탈바꿈시켜 준 것은 ‘민주주의’와 ‘투명성’이 아니었다. 바이오 벤처들이 재빠르게 개발한 ‘진단키트’와 IT 벤처들이 구축해놓았던 ‘교통카드’가 K-방역의 핵심이었다. 2015년 메르스 이후에 질병관리본부가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만들어놓았던 효율적인 산학연관 협력 시스템이 있었고, 국립보건연구원·화학연구원·생명공학연구원의 지원도 중요했다. 그러나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변신이 보장된 바이오 벤처들이 없었으면 K-방역의 성공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변이 때문에 정형화된 대응이 불가능한 바이러스에게는 역시 변신의 자유가 보장된 벤처가 제격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미국의 경우가 그렇다.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연방정부의 질병예방통제센터(CDC)가 미국 방역의 주역이다. 우리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CDC도 역시 PCR 진단키트를 개발했다. 그런데 대량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오염으로 진단키트의 현장 투입이 5주나 지연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신속한 검사(testing)가 쉽지 않고, 감염자의 추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과학강국이 전 세계 감염자의 26%와 사망자의 23%를 발생시킨 최악의 감염국으로 전락해버렸다. 정부 주도의 대형 연구소가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성급한 논공행상은 독이다
하루빨리 코로나19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정부·여당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허둥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방역 정책은 지나칠 정도로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 섣부른 장밋빛 전망은 사회적 불신으로 이어져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질병관리본부의 승격을 들먹일 때가 아니다. 코로나19와의 전투는 지금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서울‧수도권을 중심으로 다시 걷잡을 수 없는 감염이 확산되고 있다. 장군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투부대를 해체 수준으로 뒤엎어버릴 때가 절대 아니다. 자칫하면 어렵사리 작동하고 있는 방역체계가 통째로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코로나19에서 존재감을 찾을 수 없었던 과기부가 뒤늦게 복지부의 잔칫상에 숟가락을 들고 나서는 모습도 볼썽사납다.
기초·원천과 응용의 구분은 과기부를 해체해버렸던 2008년 인수위가 내놓았던 어쭙잖은 아이디어였다. 대덕에 출연연을 하나 더 만들겠다는 여당 중진의원의 지역이기주의도 관료들의 부처이기주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바이러스의 연구에 대한 장기적인 구상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된 후에 시간을 두고 검토해도 절대 늦지 않은 일이다.
애써 만들어놓은 기초과학연구원(IBS)도 걱정스럽다. IBS는 자그마한 ‘은하도시’가 대선의 정치판에서 ‘과학비지니스벨트’로 부풀려진 안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이온가속기와 국가수리과학연구소까지 떠맡았다. 긴 안목의 ‘기초연구’를 통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는 비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IBS에게 바이러스기초연구소까지 떠넘겨서는 안 된다. IBS는 과기부의 민원 해결기관이 아니다. 오히려 IBS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만들어야 한다. 연구단의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막스플랑크 형 운영 체계를 지향하겠다는 당초의 취지를 절대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5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August 19, 2020 at 11:4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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